진주를 맛보다
진주비빔밥을 완성하는 맛, 진주엿꼬장
진주엿꼬장은 대를 이어온 손맛이 켜켜이 담긴 진주의 전통 장으로,
진주비빔밥의 맛을 완성한다.
진주비빔밥 위에는 없어서는 안 될 양념, ‘진주엿꼬장’이 올라간다. 진주엿꼬장은 단순한 양념을 넘어, 진주 사람들의 오랜 미각과 삶의 방식이 켜켜이 스며든 전통 장류(醬類)다. 연암 박지원이 직접 담가 먹었다고 전해지는 그 맛은 오늘날의 식탁으로 이어지고, 세월을 건너 전해진 시어머니의 손맛과 가르침은 하나의 음식 문화로 남아 있다.
진주비빔밥의 화룡점정, 진주엿꼬장

비옥한 들녘, 남강의 물길을 품은 진주는 예부터 ‘맛의 고장’이라 불렸다. 사시사철 좋은 식재료가 풍부한 만큼, 이름난 음식도 많다. 진주비빔밥과 진주냉면, 육회, 그리고 그 맛을 완성하는 진주엿꼬장이 오래 사랑받아왔다. ‘엿꼬장’은 ‘엿고추장’의 진주 방언으로, 단순히 맵고 짠 고추장이 아니라, 엿기름과 밀, 콩, 고춧가루, 단술이 어우러져 부드러우면서도 윤기 있는 감칠맛을 낸다.
예부터 지방의 이름을 딴 고추장으로는 순창고추장, 해남고추장, 그리고 진주엿꼬장이 널리 알려져 왔으며, 그만큼 뚜렷한 지역성을 지닌 전통 장류라 할 수 있다.
예부터 지방의 이름을 딴 고추장으로는 순창고추장, 해남고추장, 그리고 진주엿꼬장이 널리 알려져 왔으며, 그만큼 뚜렷한 지역성을 지닌 전통 장류라 할 수 있다.
앉은키밀에서 시작되는 깊은 단맛

과거 경남 서부 지역에서는 집집마다 ‘앉은키밀’을 재배했다. 이 밀은 키가 작고 밀알이 풍성하게 열리는 데다 병해충에 강하고, 맛 또한 뛰어난 품종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 앉은키밀은 진주엿꼬장의 주재료로 사용되며, 진주 고유의 장맛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올해로 110년의 역사를 이어온 금곡정미소의 존재는, 이러한 지역 곡물 문화가 오랜 시간 이어져 왔음을 보여준다.
이 앉은키밀은 진주엿꼬장의 주재료로 사용되며, 진주 고유의 장맛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올해로 110년의 역사를 이어온 금곡정미소의 존재는, 이러한 지역 곡물 문화가 오랜 시간 이어져 왔음을 보여준다.
연암 박지원도 즐겨 먹은 진주 엿꼬장

진주엿꼬장에 대한 최초의 문헌 기록은 조선후기 실학자 연암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의 서간문에서 확인된다. 연암은 1792년부터 1796년까지 진주목에 속했던 안의현감 겸 진주진관 병마절제도위로 재직했는데, 1792년 아들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이 직접 담근 고추장을 함께 부친다고 적고 있다.

사랑에 놓아두고 밥 먹을 때마다 먹으면 좋겠다.
이것은 내가 손수 담근 것인데 아직 잘 익지는 않았다.”
- 연암 박지원, <서간첩>, 1792년
이 기록은 당시 진주엿꼬장이 단순한 조미료가 아닌 일상적으로 즐기던 음식이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관아와 양반가를 중심으로 널리 만들어졌음을 짐작하게 한다.
감꽃이 피면 장을 담근다

예부터 진주에서는 봄철 감꽃이 필 무렵 장을 담갔다고 전해진다. 이는 장 담그기가 단순한 조리 행위를 넘어, 계절을 읽고 시간을 기다리는 생활문화였음을 보여준다.

봄철 감꽃이 필 무렵에 담는다.”
- <한국민속종합조사보고서 경상남도편>, 1972년,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진주엿꼬장은 밀과 콩을 활용한 가루에 고춧가루, 엿기름으로 만든 단술, 소금을 섞어 만든다. 재료를 충분히 버무린 뒤 항아리에 담아 숙성시키며, 햇볕과 시간이 더해질수록 맛이 한층 깊어진다. 갓 만들어 바로 먹을 수도 있지만, 제대로 익은 엿꼬장은 단맛과 감칠맛, 매운맛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며 훨씬 부드럽고 깊은 풍미를 낸다.

조선시대에는 꿀과 기름이 들어간 음식에 ‘약(藥)’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경우가 많았다. 진주엿꼬장 역시 물엿이나 설탕 대신 꿀과 참기름을 더해 만들어, ‘약(藥)고추장’이라 부르기도 했다. 장맛을 위해 재료를 아끼지 않던 흐름 속에서, 달큰하면서도 깊은 풍미를 지닌 진주엿꼬장은 점차 지역을 대표하는 맛으로 자리해왔다.
하봉정 씨는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가 장을 담그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며, 집안 대대로 전해 내려온 비법을 익혔다. 시할머니 강경순 씨에서 시어머니 이옥순 씨로 이어진 집안의 손맛 가운데서도, 단술을 따로 만들어 넣는 방식은 진주엿꼬장 특유의 깊고 부드러운 맛을 완성하는 핵심 비법이었다. 그렇게 빚어진 한 숟갈은 진주비빔밥을 더욱 특별한 음식으로 만들어주었고, 오랜 세월 이어진 그 손맛은 이제 아들 정현철 씨에게로 전해져 다음 세대의 진주엿꼬장으로 이어지고 있다.
맛나고 값 헐한 진주비빔밥은…
다음 옆에 육회를 곱게 썰어 놓고
입맛이 깔끔한 고추장을 조금 얹습니다.”
- 1929년 12월 1일, <별건곤> -
다음 옆에 육회를 곱게 썰어 놓고
입맛이 깔끔한 고추장을 조금 얹습니다.”
- 1929년 12월 1일, <별건곤> -
한 숟갈에 담긴 시간과 계절
진주엿꼬장은 비빔밥에서 가장 빛나지만, 그 쓰임은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쌈장처럼 쌈 채소와 곁들여도 좋고, 육회에 더하면 달콤하면서도 깊은 감칠맛을 더해준다. 한 숟갈만으로도 음식의 인상을 바꾸는 힘. 그것이 바로 진주엿꼬장이 오랫동안 사랑받아온 이유다.

살짝 데쳐서 묽은 탕, 참기름, 깨소금을 쳐서 무친 다음
색 맞추어 옆옆이 담고
육회를 가운데에 듬뿍 얹고 엿꼬장을 한술 떠 놓는다.
- 황혜성, <한국요리백과사전>, 1976년
1976년 황혜성의 <한국요리백과사전> 역시 진주비빔밥의 나물과 육회 위에 엿꼬장을 한 술 더한다고 기록하고 있어, 엿꼬장이 진주비빔밥의 화룡점정이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한다.

진주엿꼬장은 단순한 달콤함에 머무는 고추장이 아니다. 계절을 기다려 담그고, 시간을 들여 익히며, 지역의 재료로 완성해온 ‘진주의 맛’이다. 따뜻한 밥 위에 진주엿꼬장을 올려 비비는 순간, 그 안에는 감꽃이 피던 봄날과 정성껏 장을 담그던 손길, 그리고 켜켜이 쌓인 시간이 함께 스며난다. 진주를 맛본다는 것은, 어쩌면 이 진주엿꼬장 한 숟갈을 제대로 음미하는 일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