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를 말하다
예술의 방식으로, 우촌 최태문
진주 비봉산 자락에서 태어나 반세기 넘게 그림을 그려온 우촌(牛村) 최태문.
그는 평생 전업 작가로 살아오며 예술의 방식으로 자기 세계를 보여주었다.

진주 상봉동의 오래된 골목을 따라 걷다 보면, 우촌화실을 만나게 된다.
털 한 올까지 살아 있는 소, 몇 개의 선만으로 남겨진 소. 그 사이에 우촌(牛村) 최태문이 있다.
그는 여전히 소를 그린다. 이유는 단순하다.
“소를 그릴 때 제일 마음이 좋습니다.” 그에게 소는 대상이 아니다.
가족이고, 동반자이며, 긴 세월을 함께 건너온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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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청년 시절 다양한 소재를 그리셨습니다. 그 시절은 어떤 시간으로 남아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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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처음에는 산수화, 화조화, 동물화, 인물화, 기명절지도 등 여러 소재의 그림을 두루 그렸습니다. 1969년에는 한국화 국전이라 할 수 있는 백양회 공모전에 초가집 풍경을 그린 그림을 출품해 입선하기도 했습니다. 그 무렵 백포 곽남배 선생님께 지도를 받으며 그림의 기초를 다졌습니다.
청당 김명제 선생님께는 화조를 배웠고, 내고 박생광 선생님을 만나면서 소와 목단 그림에 더 깊이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특히 박생광 선생님은 제가 화가로 살아갈 수 있도록 길을 터주신 분입니다. 동물화와 인물화는 금추 이남호 선생님께 배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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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고 박생광 선생(왼쪽)과 우촌 최태문(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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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포 곽남배 선생이 물려준 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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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그때는 생업으로 귀금속 기술을 배우던 시절이었지만, 진주에 훌륭한 선생님이 오셨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어떻게든 찾아가 배움을 청했습니다. 배운 것은 다시 복습하고, 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애썼습니다.
돌아보면 그림은 재능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열성적으로 배우고, 배운 것을 자기 안에서 다시 익히지 않으면 아무것도 깨우칠 수 없다는 것을 그 시절의 공부를 통해 배웠습니다.
“최 사장이 아니라
우촌 선생으로 살아갈 운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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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화가로 살아가게 된 전환점은 무엇이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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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사실 젊을 때는 ‘최 사장’이 되어 돈도 잘 벌고 풍족하게 사는 삶을 꿈꾸었습니다. 그런데 운영하던 금은방에 도둑이 들어 오랫동안 이뤄놓은 것들이 한순간에 무너졌습니다. 당시에는 견디기 힘들 정도로 절망스러웠습니다.
하지만 지나고 보니 그것이 전화위복이었습니다. 오히려 제가 정말 그리고 싶었던 그림을 그리며 살아갈 수 있는 길이 열렸으니까요. 그때 깨달았습니다. ‘나는 최 사장이 아니라 우촌 선생으로 살아갈 사람인가 보다.’ 극과 극의 삶을 모두 겪고 나서야 제 숙명을 알게 된 셈입니다.
예술가로 살아온 길은 쉽지 않았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그림을 그리며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삶을 살게 된 것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소는 제게 생계였고,
결국 숙명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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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우촌 최태문’ 하면 가장 먼저 ‘소’가 떠오릅니다. 많은 소재 가운데 ‘소’가 선생님의 작품을 대표하게 된 이유는 뭘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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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소 그림을 그렸을 때 상도 많이 받았고, 그 그림을 좋아해 주시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작품을 보고 찾아와 “소 그림을 그려 달라”라고 부탁하는 분들도 생기면서 자연스럽게 소를 더 많이 그리게 되었습니다.
저는 전업 작가였습니다. 그림을 팔아 가족을 부양하고, 자녀들을 공부시키고 결혼까지 시켜야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이 좋아해 주는 그림, 잘 팔리는 그림을 많이 그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눈물겨운 현실 속에서 생활과 작업을 함께 버텨온 셈입니다.
전업 작가에게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기억하고 알아주는가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것은 곧 생계와도 맞닿아 있는 일이니까요. 그래서 ‘소의 작가’라는 이름을 지키기 위해 소를 더 깊이 공부했고, 소 그림을 계속 붙들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소는 단순히 잘 팔리는 소재가 아니게 되었습니다. 소는 부지런하고, 우직하고, 사람 곁에서 살아온 동물입니다. 옛날에는 집안의 큰 재산이었고, 농사와 생활을 함께한 가족 같은 존재였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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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백포 곽남배 선생님께서 제게 ‘우촌’이라는 호를 지어주셨습니다. 소 우(牛)에 마을 촌(村). 소처럼 우직하게 그림을 그리라는 뜻이 담겼는데, 당시는 제가 본격적으로 소 그림을 그리기 전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제 삶의 방향을 미리 짚어주신 이름 같기도 합니다.
제 그림을 좋아하는 분들은 “선생님이 소를 닮았다”라고도 말씀하시는데, 저는 그 말이 싫지 않습니다. 오히려 고맙고 뿌듯합니다.
결국 사람들이 소를 사랑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소 안에는 부지런함과 정직함, 가족을 위해 묵묵히 견디는 삶의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저 역시 그런 마음으로 소를 대하고 그립니다. 그래서 제 소 그림을 보고 많은 분들이 “정겹다”라고 말씀해 주시는 것 같습니다.
그림 전체가 살아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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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소를 그릴 때 특히 ‘눈’을 중요하게 보신다고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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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소의 눈은 크고 참 예쁩니다. 가까이 들여다보면 그 안에 희로애락이 담겨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화가 난 소인지, 편안히 쉬고 있는 소인지, 즐거워하는 소인지는 자세에서도 드러나지만 결국 눈에서 결정됩니다. 눈의 형태와 움직임이 살아 있어야 소의 감정도 살아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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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눈’ 하나로 작품 전체의 분위기가 달라지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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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그럼요. 저는 먹을 많이 사용해 그림을 그리는데, 먹의 농담에 따라 눈의 느낌도 달라집니다. 때로는 소의 눈동자를 크게 당겨 그릴 때가 있는데, 그 안에 넓은 대지가 펼쳐져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제가 그린 소 그림 속에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사랑이 있고,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가 있습니다. 부모에 대한 효도, 어른 공경, 친구와의 우정 같은 마음을 소의 눈과 몸짓 안에 담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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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앞으로 어떤 소를 그리고 싶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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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소는 가만히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많이 움직입니다. 그래서 스케치가 쉽지 않습니다. 사진을 찍어 구도를 잡을 때 참고하기도 하고, 그동안 공부하며 모아온 소의 자료도 많습니다. 앞으로도 그 자료들을 바탕으로 여러 화풍의 소를 계속 그리고 싶습니다. 더 나아가 형태를 조금 덜어낸 추상적인 소 그림도 시도해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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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오랜 세월 붓을 잡아 오셨지만, 지금도 그림 앞에서 긴장되는 순간이 있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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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사람인 까닭에 그림이 잘 안될 때도 있습니다. 선도 잘 나오지 않고, 먹색도 마음처럼 나지 않는 날이 있지요. 특히 날씨가 좋지 않은 날에는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그럴 때 마음이 상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작가는 스트레스에 빠져 있으면 안 됩니다. 그림이 잘 안되는 날에는 책을 보거나 구도를 잡는 시간을 가지면 좋습니다.
100호 이상 큰 그림을 그릴 때는 지금도 긴장됩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천천히, 조금씩 그려나가며 마음을 다스립니다. 결국 그림을 그리는 것도 마음을 다스리는 일과 다르지 않습니다.


“타고난 천성이기도 하고
그리지 않으면 안 되고, 그려야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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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일본과 미국 등 국내외에서 40여 차례 개인전을 열어오셨습니다. 여든을 넘긴 지금도 매일 그림 앞에 앉게 하는 힘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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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젊을 때는 그림을 그리지 않으면 생계가 어려웠기 때문에 정말 열심히 그렸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것이 습관이 되었고, 제 삶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초등학교 때 공책에 그림을 그리다가 혼나던 아이가 어느덧 여든을 넘긴 노인이 되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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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그런데 아직도 만족할 만큼 성취했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화가의 길은 단거리 경주가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결승점을 향해 조금씩 나아가는 길이예요.
붓을 꺾고 싶은 순간도 있었고, 마음에 들지 않아 찢어버린 화지도 수없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런 시간 속에서 선은 깊어지고, 그림도 사람도 조금씩 익어갔다고 생각합니다.
조급해서도 안 되고, 나태해서도 안 되며, 자만해서도 안 돼요. 붓을 들 수 있는 날까지 묵묵히 걸어가는 것. 그것이 저를 그림 앞에 앉게 하는 힘입니다. 신기하게도 그 마음은 조금도 늙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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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전업 작가에게 작품은 예술이면서 동시에 생계이기도 합니다. 작품의 가치를 정할 때 지키고 싶었던 원칙은 무엇이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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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그림값은 보통 ‘호’로 정합니다. 우편엽서 한 장 크기를 1호로 보고, 10호를 기준으로 가격을 계산하기도 합니다. 물론 작가의 경력과 작품 세계에 따라 그 값은 달라집니다.
저는 전업 작가였기 때문에 전시회를 열 때마다 작품 가격을 정하고, 때로는 조율도 해야 했습니다. 사실 작품을 두고 돈 이야기를 나누는 일은 늘 쑥스럽고 미안했습니다.
저는 무리하지 않게 그림값을 받으려고 했습니다. 인간적이고 부드러운 작가로 살아남기 위해 노력했고, 그 마음은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돈을 받고 작품을 건네는 일은 거래입니다. 하지만 전업 작가는 그림으로 살아가야 하므로 그 현실을 외면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장사꾼처럼 되어서는 안 됩니다. 작가로서 긍지만은 끝까지 지켜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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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예술가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후배들에게 한 말씀 부탁합니다. -
A.
사랑하는 후배들에게 꼭 전하고 싶은 말은, 예술의 길은 혼자 걷는 것 같지만
결국 우리가 모두 동행하는 어려운 길이라는 것입니다.
이왕 선택한 길이라면 쉽게 물러서지 말고,
무엇을 그리고 어떻게 그릴 것인지 스스로 잘 선택해야 합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누가 더 잘 견뎌냈는가, 누가 쉬지 않고 노력했는가’라고 생각합니다. 기초에 충실하면 훗날 자기 세계가 완성되어 갈 때 훨씬 수월해집니다. 평가는 먼 훗날의 몫이니, 지금은 최선을 다하고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누구나 창조성의 거장이 될 수 있고, 노력한 만큼 기쁨도 커진다고 믿습니다.
진주는 우리나라 지방 종합 예술제의 효시인 개천 예술제가 열리고
경남문화예술회관이 자리한 문화, 예술의 도시입니다.
선배 예술인들이 지키고 빛내온 예술의 토양을 이제는 우리가 잘 이어가야 합니다.
예술인은 자기 작품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후배와 제자를 길러내는 일도 중요합니다.
자신이 닦아온 길을 다음 세대에게 아낌없이 전해줄 때
진주의 예술도 계속 이어질 수 있습니다.
그런 마음들이 모여 진주가 인심 좋고 정다운 고장,
예술인들이 즐겁게 찾아오고 후배 예술인들이 마음껏 활동할 수 있는
문화예술 도시로 남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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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어떤 예술가로 기억되길 바라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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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고향 진주를 사랑하고 가꾸려고 노력했던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예의 바르고, 선배를 존중하고, 후배를 사랑했던 다정한 사람으로 알아주신다면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목적을 향해 열심히 노력한 사람, 인간적인 사람, 고향을 대표하는 예술인으로서 고향을 지키는 어른의 의무를 다하려 했던 사람. 그렇게 기억된다면 참 감사하겠습니다.
그는 오늘도 자신이 받은 것을 다시 고향과 후배들에게 돌려줄 방법을 생각한다.
오늘도 그의 붓끝에서는 한 마리의 소가, 한 송이의 꽃이, 또 다른 무엇인가가 생명을 얻는다.
그의 그림이 마음에 오래 남는다면, 그것은 소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 안에는 끝까지 자기 길을 걸어온 한 사람의 긍지가 함께 담겨 있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