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를 탐하다
예술이 기억한 도시, 진주 : 이성자를 중심으로
진주는 오래전부터 예술적 감수성과 역사적 층위가 공존하는 도시였다. 남강의 굽이와 촉석루의 선들은 예술가들에게 삶의 기억과 미학적 사유를 촉발하는 풍경으로 자리해 왔다.
김보아 진주시립이성자미술관 학예연구사
진주의 자연과 역사, 그리고 사람들은 시대마다 서로 다른 언어로 변주되며 회화 속에서 새로운 얼굴을 드러낸다. 그 중심에는 고향의 정서를 추상의 언어로 승화한 이성자가 있다.
그의 작품은 진주라는 도시를 단순한 지리적 장소가 아닌 예술적 기억이 응축된 정신적 지형으로 확장했다.
이곳의 자연과 역사, 그리고 사람들은 시대마다 서로 다른 언어로 변주되며 회화 속에서 새로운 얼굴을 드러낸다.
그 중심에는 고향의 정서를 추상의 언어로 승화한 이성자가 있다. 그의 작품은 진주라는 도시를 단순한 지리적 장소가 아닌 예술적 기억이 응축된 정신적 지형으로 확장시켰다.
고향의 정서가 추상의 풍경이 되다 : 이성자
이성자, 〈진주 1960년〉, 1960년, 캔버스에 유채, 145.5x112.5cm.
ⓒ진주시립이성자미술관
이성자(1918–2009)는 진주에서 태어나 1951년 이후 프랑스에서 활동한 작가로, 동서양 조형 언어의 접점을 개척한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젊은 시절 떠나온 고향에 대한 기억을 조형적 원천으로 삼았다.
〈진주 1960년〉은 작가의 내면에 남아 있던 진주의 정서를 추상적 구성으로 응축한 대표작이다. 화면의 색면은 남강의 물결처럼 부드럽게 흘러가고, 서로 맞물린 형태들은 산세의 율동과 기억의 파동을 담아낸다. 붉은색과 청색의 대비는 감정의 진폭을 시각화하며, 이성자 특유의 ‘추상적 감정의 지도’를 이루어낸다. 이 작품에서 풍경은 재현의 대상이 아닌 기억이 남긴 정서적 결이 색과 선의 리듬으로 전환된 정신적 풍경이다.
이성자의 〈진주 1960년〉은 작가의 초기 기억이 추상적 질서로 전환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작업으로, 이후 전개되는 ‘우주 시대’ 회화의 미학적 기반을 예고한다. 우주적 공간을 향한 전환은 이전 시기까지 지속되던 산 풍경의 구체적 형상을 과감히 비워내는 데서 비롯된다. 이는 재현의 근거였던 지상의 이미지를 놓아버림으로써, 땅에 매여 있던 시각적 전통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하고 보다 근원적인 조형 세계에 진입하려는 작가적 결단이기도 하다.
이성자, 〈혜성에 있는 나의 오두막, 12월, 98〉, 1998년, 캔버스에 아크릴릭, 73x92cm. ⓒ진주시립이성자미술관
화면 곳곳을 구성하는 수많은 별, 그리고 음양의 구조적 모티브는 더 이상 특정한 장소성을 지시하지 않는다.
제목을 제거하면 무엇을 묘사한 것인지 단정하기 어려운 이 추상성은 작가가 도달하고자 했던 ‘개인의 내적 우주’의 실체를 드러낸다. 이성자에게 ‘우주’는 상상의 공간이 아닌 ‘인간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라는 근원적 질문에 닿아 있는 정신적 원천이었다. 일반적으로 우주가 어둡고 낯선 세계로 인식되는 것과 달리, 작가에게 우주는 귀향의 감각을 지닌 안식처이며 존재론적 낭만성의 근원이었다.
화면에 적용된 파스텔 색조의 부드러운 색조는 겹침과 투명성을 통해 저 너머의 차원을 암시하며, 곳곳의 드리핑 효과는 별자리의 진동처럼 남아있다. 이러한 조형적 선택은 이성자가 구축한 추상적 우주 공간이 단순한 비가시적 영역이 아니라, 감각적 경험과 정신적 탐구가 교차하는 장소임을 보여준다.
진주시립이성자미술관
진주시립이성자미술관은 이성자 화백이 생전에 기증한 376점의 작품과 아카이브를 기반으로 2014년에 준공되어 2015년 7월 16일 개관하였다. 개관 이후 미술관은 기증 작가의 예술세계를 심층적으로 조명하는 전시뿐 아니라, 지역 미술 문화의 지평을 넓히는 다양한 기획 전시를 꾸준히 선보여 왔다.
특히 미술관은 진주의 예술 정체성과 한국 화단의 흐름을 연결하기 위해 ‘한국 채색화의 흐름’ 시리즈 전시를 특별기획전으로 개최하며 주목받았다.
이 시리즈는 전통 채색화의 미감과 현대적 변용을 조망하고, 채색화 작가들의 색채 감각을 동시대적 맥락 속에서 재조명하는 중요한 플랫폼이 되었다. 이를 기반으로 미술관은 진주의 지역적 특성과 ‘채색화’라는 장르를 결합한 특별 연례 기획전을 꾸준히 선보이며, 지역 미술의 정체성을 키워내며 관심을 끌어내고 있다.
1956년 살롱 데 앙데팡당의 이성자 화백
이와 함께 미술관은 어린이·청소년·성인을 아우르는 다양한 교육·문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전시 연계 워크숍, 도슨트 아카데미, 청소년 진로 체험교육, 주말 미술 체험 등은 지역민의 문화예술 향유권을 넓히는 핵심 프로그램으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활동들은 이성자 화백의 예술정신을 지역사회와 연결하며, 미술관이 문화적 기반 시설로서 역할을 확장하는 중요한 기반이 되고 있다.
이성자, 〈5월의 도시 N.5, 74〉 1974년, 캔버스에 아크릴릭, 60x80cm.
ⓒ진주시립이성자미술관
이성자의 작품을 마주하면 진주는 하나의 풍경을 넘어 ‘예술이 기억하는 도시’로 확장된다. 그가 남긴 추상적 풍경은 고향의 정서를 미적 사유로 승화하며, 세대와 시대를 넘어 계속해서 새로운 의미를 생성하고 있다. 예술가가 남긴 시선은 진주라는 도시의 얼굴을 더욱 입체적으로 만든다. 그리고 이 기억의 풍경은 오늘도 미술관과 도시 곳곳에서 조용히 이어지고 있다.

한국 최초의 여성 추상미술작가
이성자 화백(1918~2009)
1951년 한국을 떠나 파리에서 본격적으로 조형예술을 공부했으며, 특히 유화와 목판화에 특유의 한국성을 담아 주목을 받았다. 이후 유럽 전역과 아시아까지 이르는 활발한 전시 및 작품활동으로 대한민국 근현대 미술사를 대표하는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자신의 동양적인 유산에서 나온 오묘한 성격을 그대로 간직한 채 서양미술의 흐름 속에 용기 있게 합류하는 본보기”라고 평가되었으며, 프랑스 거장 미쉘 뷔토르와의 공동작업을 통해 조형예술과 문학의 융합을 시도했고, 도자기, 태피스트리, 모자이크, 시화집에 이르기까지 회화적 조형성을 뛰어넘어 다양한 영역에서 시대를 초월한 예술적 영감과 미적가치를 담은 작품을 남겼다.
- 1991프랑스정부 예술문화공로기사 훈장
- 1999제7회 KBS 해외동포상
- 2001프랑스정부 예술문화공로자훈장
- 2003진주여고 제1회 자랑스런 일신인상
- 2009보관문화훈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