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를 명하다
일편심, 진주 장도(粧刀)의 시간
유네스코 공예‧민속예술 창의 도시 진주시의 오늘을 증명하는 것이 있다. 바로 진주 장도(粧刀)다.
진주시는 2019년 유네스코 공예·민속예술 창의 도시로 지정되며 전통과 현대 공예가 공존하는 도시로서 위상을 굳혔다.
유네스코 공예·민속예술 창의도시 진주
불이 꺼지지 않는 장도장전수교육관
장도의 본래 자리,
생활용품이자 마음의 장신구
우리 선조들은 성인이 되면 한 뼘 남짓한 작은 칼을 몸에 지니고 살았다. 옷고름에 차면 패도(佩刀), 주머니에 넣어 다니면 낭도(囊刀), 그리고 그 모든 작은 칼을 통틀어 우리는 장도(粧刀)라 불렀다.
이 칼은 누군가를 공격하기 위한 무기가 아니라, 스스로를 지키겠다는 다짐의 상징, 신념과 정절을 붙들어 매는 ‘마음의 장신구’에 가까웠다. 일상에서는 더없이 실용적인 도구였다.
칼과 가위가 흔치 않던 시절 깎고, 자르고, 다듬는 집안의 자잘한 일을 도맡았던 생활필수품이자, 사랑하는 딸을 시집보내며 건네던, 아버지가 관례를 치르는 아들에게 내리던 의식의 선물이기도 했다.
“우리 조상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장도를 지니고 다녔어요. 선비들은 소매 속에, 여성들은 주머니에. 늘 몸에 지니고 쓰던 일상생활용 칼이었습니다.”
진주만의 장도,
일편심으로 이어지다
진주 장도장을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십장생 문양이다. 쪼이질은 새가 모이를 쪼듯, 작은 정 하나로 은판을 수만 번 두드려 문양을 솟아오르게 하는 전통 조각 기법인 쪼이질로 십장생과 구름, 꽃과 학이 피어난다. 요즘에는 주물을 이용해 문양을 ‘찍어내는’ 방식도 있지만, 진주에서만은 아직도 쪼이질 소리가 그치지 않는다. 임장식 장도장은 단호하게 말한다.
“쪼이질을 포기하는 건, 은장도를 포기하는 겁니다.”
진주 장도장에는 독특한 표식이 있다. 바로 칼날에 새겨진 세 글자, 일편심(一片心).
예전에는 남성 장도에 군자도를, 여성 장도에는 일편심을 쓰기도 했지만, 이제는 성별 구분을 넘어 ‘한결같은 마음’을 새기는 말로 쓰고 있다.
크고 작음을 떠나서, 장도명이 ‘일편심’입니다. ‘일편단심’의 약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제가 지어낸 말이 아니라, 원래 우리 조상들이 장도 도신(刀身)에는 ‘일편심’과 ‘군자도’를 썼습니다. 저는 일편심만 쓰고 있습니다.
도구까지 직접 만드는
장인의 세계
임장식 장도장은 초대 기능보유자 고(故) 임차출 장도장의 둘째 아들이다. 어릴 적부터 아버지 곁에서 풀무로 바람을 넣는 ‘바람잡이’로 공방의 불길을 지키며, 쇳덩어리가 칼이 되어가는 순간들을 눈과 몸에 새겼다. 그렇게 배운 숨과 손놀림으로 그는 이제 칼날을 벼리고, 은판을 두드려 문양을 일으키는 쪼이질까지 장도 제작의 전 과정을 온전히 계승한 2세대 장도장이 되었다.
도구도 남다르다. 장도에 쓰이는 정과 망치, 작은 공구들은 시중에 파는 게 아니다.
“장도 도구는 따로 안 나옵니다. 장인이 직접 만들어 써야 해요. 제가 쓰는 도구 중에는 아버지가 쓰시던 것도 있습니다. 2대를 거쳐 같이 쓰는 거죠. 제자들도 자기 도구를 직접 만들 수 있어야 합니다. 도구를 만들 줄 모르면 장도 기능에 접근을 못 해요.”
불이 꺼지지 않는 장도장전수교육관
20년 동안 200명, ‘체험’에서 ‘전승’으로

진주 장도장 전수교육관은 2005년에 문을 열었다.
이듬해인 2006년부터는 진주시민을 대상으로 한 체험·단기 교육을 꾸준히 이어오고 있다.
“1년에 열 명 정도 뽑아서 교육했어요.
20년쯤 지났으니까, 200명 정도가 거쳐 간 셈이죠. 진주에서는 장도를 실제로 본 사람도 그만큼은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전국으로 시선을 넓히면 상황은 다르다. 경북 영주 너머 북쪽에는 장도 장인이 아예 없고, 서울·경기도·충청도에도 전통 장도를 만드는 공방은 드물다.
전통 장도는 지금 대한민국에서 진주밖에 만들지 않습니다. 특히 쪼이질로 조각하는 전통 기법은 더더욱 그렇고요. 대한민국 장도 장인이 다섯 손가락에 꼽힐 정도로 귀합니다.
그래서 그는 쪼이질을 양보할 수 없다고 말한다.
제자에게, 또 제자의 제자에게까지 이어져야 할 진주 장도의 심장이기 때문이다.

전통을 지키는 건,
끝까지 양보하지 않는 사람이 하는 일
장도는 한국 고유의 문화유산이다. 중국에도, 일본에도 없는, 오직 한반도에서만 사용해 온 것이다. 그래서 그의 바람은 자연스럽게 국경을 넘는다.
“해외 전시를 통해 실물을 보여주는 게 제일 좋습니다. 먹고 살기도 빠듯하지만, 언젠가는 진주 장도와 한국의 장도를 세계에 제대로 소개해 보고 싶습니다.”

경남도 무형문화재 제10호 진주 장도장 기능보유자 임장식은 작은 정 하나로 수만 번 두드려 문양을 올리는 전통 기법 ‘쪼이질’을 지켜내며, 한 자루의 칼에 공예 도시 진주시의 혼을 새기고 있다.
밤 10시, 진주 장도장 전수교육관의 불빛이 조금씩 잦아든다. 하지만 장도의 역사를 이어가려는 그의 마음, 그리고 칼날 위에 새긴 세 글자, 일편심만은 여전히 뜨겁다.
“장도는 결국, 우리 조상들이 쓰던 일상생활용 칼입니다.
그 칼 하나에 담긴 마음과 이야기를, 진주에서 계속 이어가고 싶습니다.”
진주의 오늘을 비추는 은장도. 임장식 장도장의 손안에서 진주의 시간이 조용히, 그러나 깊게 벼려지고 있다.
경남도 무형문화재 제10호 진주 장도장 기능보유자 임장식